지금, 여기에서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가 죽어서 갈 천국을 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조금씩 조금씩 체험되어지고 확장되어 지는 하나님 나라의 경험으로 인해, 성도는 영원한 나라에 입성할 때 경험하게 될 천국이 별로 낯설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영원한 천국만 바라 보고, 내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지금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가 들어 가는 천국은 매우 불편한 곳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죽어서 갈 천국은 지금 이 곳에서 추구되어 져야 하고, 맛보아 져야 합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못 나가 지만, 여름이면 떠나는 단기 선교롤 틍해 많은 성도들이 복음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선교지에서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며, 그 과정에서 주님을 경험합니다. 그로 인해, 선교를 다녀 온 성도들은 선교에 더욱 깨어 있게 되고, 선교사님들의 필요에 더 민감하게 되고, 선교지를 위해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타국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를 증거하는 것은 개인과 교회에 큰 축복을 가져 옵니다. 그런데, 만일 여름에 타국에서 1-2주 동안 복음을 전하면 은혜를 체험하지만, “지금 내가 처한 곳에서” 불신자 이웃을 등한히 여기고 있다면, 우리는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예수를 믿지 않으면 타국의 미전도 종족이 지옥을 간다는 사실이, 내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됨을 믿는다면, 언제가 단기 선교라는 것을 가서 특수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간절함과 지금 있는 곳에서 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절박함은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에서는 상냥하고 친절하고 헌신적이지만, 집에서는 내키는 대로 산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 세대에 질문할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하나님”과 “집에서의 하나님이 다른 것이냐고.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보이는 진솔함과 가정에서의 신실함에 차이가 있다면, 마치 복음은 교회라는 “거기”에서만 역사하고, 가정이라는 “여기”에서는 역사하지 않는 것 같은 잘못된 뉘앙스를 주게 되지 않을까요? 한 사람이 거듭났다면, 그 사람은 어느 곳에서나, 어디서나, 새로워진 영혼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거듭난 영혼은 교회에서 만큼 가정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드러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의 삶의 괴리를 허용하는 것은, 복음으로 인한 거듭남이 개인의 내면에 어떤 일을 하는 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거듭난 영혼은 새로워 진 그 순간부터 (시간), 있는 자리에서 (공간) 복음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 갑니다.
“언젠가, 그 곳에서”하게 될 그 무엇과 “지금, 이 곳에서” 하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면, 이는 신앙의 불연속성이요, 바리새인의 외식입니다. 그래서, 타국에 있는 미전도 종족의 전도하는 선교와 내 주변에 있는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구제는 둘 다, 복음의 본질적인 사역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에서 칭찬하신 사람들의 행위는 어디 멀리 있는 사람들을 위한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언제가 하겠다는 다짐에 대한 칭찬도 아니었습니다. 내 주변의 “지극히 작은 형제” 에게, 지금 하고 있었던 것이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내 주변의 작은 지체에게 하고있는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칭찬과 격려였습니다.
사랑펀드는 “지금, 여기”를 타겟으로 합니다. 우리 주변 가까운 곳에 (지리적으로 & 심리적으로) 힘들어 하는 영혼을 돕습니다. 땅 끝에 있는 선교사님들을 돕는 선교 사역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지금, 여기에” 있는 약한 지체를 돕는 구제 사역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 땅에서” 의 사역만 생각하고, “지금, 여기에서” 의 사역을 등한시 할 수 없습니다. 사랑펀드는 교회가 국가의 도움에서 부지 불식 간에 소외된 작은 자들을 “지금 여기” 라는 local context에서 찾아서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일에 작은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언젠가, 거기에서” 하겠다는 고백만큼,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순종이 중요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정용철 목사